6.25전쟁 직전에 벌인 소련군의 만행[0]
조회:247추천:0등록날짜:2022년02월01일 12시01분
6.25전쟁 직전에 벌인 소련군의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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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계열 조선인 항일무장투사들을 소련의 스보보드니(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로 유인하여 1천여명 가까이 몰살시켜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무장투쟁의 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다. 조선독립운동을 일제보다 더 잔인하게 박해한 나라이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해방군이 되기에는 이미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원죄가 너무 컸다.
1945년 소련군은 잔류하던 일본 민간인 아녀자 1천여 명을 비참하게 강간·살해하는 이른바 “거건먀오(葛根廟, 갈건묘)” 대학살을 일으켰다. 이어서 소련군은 랴오닝의 선양(瀋陽)에서 사흘간 법망을 완전히 벗어나 강간, 약탈, 방화 등 반인류적 범죄를 이어갔다. 소련군의 만행을 참다못한 하얼빈 시민들은 “홍색(紅色) 제국주의 타도”의 구호를 외치며 저항할 정도였다. 8월 하순, 북한에 진주를 완료하자마자, 각 도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른바 조선인의 정권 집단을 만들어서 일제로부터 행정권을 위탁받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이로써 기존의 ‘건국준비위원회’는 ‘인민위원회’로 바뀌었다.
이후 5개 도의 인민위원회는 1945년 11월 6일 ‘북조선 행정국’으로 통일되어 조만식이 책임자가 되었으나, 3개월 후인 1946년 2월 소련은 김일성에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케 하여 김일성 중심의 정권 체제를 성립시켰다. 그와 동시에 조만식은 연금되고, 모든 것이 김일성의 독재로 기울어져 갔다.
1945년 11월 21일 용암포에서 시민대회가 열렸었는데, 이곳에서 공산당 비난 연설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집회는 공산당 성토장으로 변하였고, 공산당원으로 구성되어있던 무장 진입 부대가 출동하여 시민과 학생들을 공격했다. 신의주 학생자치대 본부는 해당 사건을 조사하고자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소련군사령부는 이들의 조사를 저지하였다. 이에 학생대표들은 11월 23일 신의주공업학교에 모여 공산당 타도 데모에 나서기로 결의하였다. 데모 당일 학생들은 무장충돌에 직면했고 소련군인들은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일부 증언에 의하면 기총소사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13명의 학생들이 기총소사에 목숨을 잃었다. 당일 학교측에서 확인한 사망자는 24명, 체포자는 천여명에 달했다. 이후 소련군정의 검거선풍이 일었고, 학생조직은 궤멸하였다.
소련은 약 63,000명의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이들을 모두 억류하여 시베리아나 기타 점령 기지에 보내서 노역에 종사케 하였다. 만주나 북한에 있던 일본인 관리들도 모두 억류되어 노역에 종사해야만 했다. 그들이 일본으로 최종 귀환된 것은 1949년이다.
1945년 12월 29일 작성하여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위원인 스티코프 상장에게 올린 13쪽 분량의 보고서가 공개되었는데, 당시 소련군의 약탈 상황을 가감 없이 현장감 있게 전달한다. 보고서 내용에는 258 소총사단장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봉기땐 절반 교수형 시킬것” 처벌 거의 없어 만행 지속 / “일벌백계” 건의도 묵살당해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하면서 북한의 산업시설을 철거해 갔으며, 각 공장의 기계와 부속품을 뜯어 갔다. 소련군 병사 약 3,000명은 수많은 트럭을 동원해서 수풍댐의 발전기 3, 4, 5기를 해체하여 가져갔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자동차들도 실어 갔다. 무수히 많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거나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 김일성은 이런 일을 뻔히 보면서도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련의 산업설비 반출에 협1력하기도 했는데, 스탈린에 의해 소련의 대리인으로 발탁된 인물의 한계를 보여준다.
1946년 3월 13일 함흥에서는 학원으로까지 침투해오는 공산마수를 규탄하기 위해 학생들이 선두에서 반소·반공운동을 벌였다가 1백여명이 사상되고 7백여명이 투옥됐었다.
소련군은 일본인, 조선인 할 것 없이 부녀자들을 겁탈했다. 북한에 있던 사람들은 돈이나 집이나 기타 재산보다도 부녀자의 겁탈을 제일 무서워했다. 그래서 돈을 거두어서 직업여성으로 하여금 소련군의 위안부 노릇을 하게 했다. 개중에는 소련군의 강간을 막다가 살해된 사람도 있었고, 특히 일본인 여성에 대해 심해서 그들은 조선인 가정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행인들의 손목시계를 빼앗아 2∼3개씩 차고 다니는 소련군 병사들도 있었다. 살해된 사람의 돈과 귀중품을 훔치는 것은 물론, 금니까지 뽑아 갔다. 이러는 동안에도 북한 공산당은 소련군을 조선의 해방군이라며 그들에 대해서 일언반구 불평을 하지 못했다.
북한 동포는 이런 소련군의 약탈을 견디다 못해서 100만 명이나 남한으로 넘어오게 되었고, 일본인 이재민들도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했다.
반응 있으면 중국의 만행편도 작성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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