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에 딸 떠난 지 8년…"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1]
조회:834추천:0등록날짜:2023년03월13일 11시33분
학교폭력에 딸 떠난 지 8년…"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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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학폭으로 2015년 5월 숨진 박주원양
가해자 손배 소송에 법원은 “인과관계 부족”
“주원이 언니가 최근에 정순신 사건 기사를 보내주면서 말하더라고요. 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지난 7일 경기 과천시에서 만난 이기철(56)씨는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가 자진 사퇴한 정순신 변호사 아들의 학교폭력 사건 기사를 보며 잠을 설쳤다고 했다. 이씨의 딸인 고 박주원(사망 당시 16살)양은 고등학교 1학년이던 2015년 학교폭력 피해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씨는 딸이 세상을 떠난 지 8년이 흘렀지만 한국 사회가 학교폭력에 대응하는 모습이 ‘형식적인 면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가해자를 진심으로 뉘우치게 하고,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을 지원하는 방식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2012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사립중학교에 입학한 박양은 1학년 1학기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같은 학교 학생 ㄱ양은 페이스북에 박양을 비난하는 글을 올리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따돌렸다. 인근 다른 중학교에 다니는 초등학교 동창생도 비슷한 시기 카카오톡 단체방에 박양을 초대해 당사자와 가족과 관련한 모욕을 하기도 했다.
박양에 대한 폭력은 학교 안팎에서 벌어졌다. 박양은 어느 날 물벼락을 맞아 온몸이 젖은 채 집에 돌아오기도 했고, 학원 화장실에서 폭행을 당한 적도 있었다. 이씨는 박양과 함께 가해 학생을 신고하려 경찰서도 찾아갔다. 그러나 박양이 “복수가 걱정돼 수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경찰에 따로 말하면서 수사는 무산됐다.
수차례 학교를 찾은 이씨에게 담임교사 등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가해 학생과 학부모는 학교에서 감당이 안 된다”며 박양을 멀리 전학 보내라고 권했다. 그해 연말께 박양이 인천의 한 중학교로 전학 가기 전까지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는 한번도 열리지 않았다.
2015년 3월, 가족과 지내고 싶어 다시 강남구의 한 여고로 진학한 박양은 또다시 고통을 받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도 집단 따돌림과 언어폭력이 이어졌다. 박양은 “엄마, 나 중학교에서 (가해자) ㄱ이 아무도 내 주변에 못 오게 했잖아. 여기서도 아무도 내 주변에 오지 않아”라고 말하며 울기도 했다. “중학생 때엔 버텼지만 이번엔 아무 기운이 생기질 않는다”던 박양은 그해 5월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다. 30일 넘게 중환자실에 있었지만 끝내 숨지고 말았다.
딸이 죽은 뒤에야 경찰과 학교는 조사에 나섰다. 경찰은 박양 고교를 압수수색하고 같은 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도 했다. 그러나 경찰은 ‘의심 가는 정황은 있으나 물리적 폭력이 없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학교 학폭위도 경찰 수사를 바탕으로 ‘피해자와 가해자 없음’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씨는 2016년부터 8년째 가해자·학교법인·서울시 등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씨가 소를 제기한 대상은 34명인데, 학교가 가해자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소장을 전달하는 데만 수년이 걸렸다. 지난해 2월에야 나온 1심 선고에서, 재판부는 법정에 출석하지 않는 등 무대응으로 일관한 가해자 학부모 1명에게만 5억원 상당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하고 나머지 피고들에 대해선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2012년 박양이 사이버 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이 폭력이 박양 사망 3년 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불법행위와 망인의 극단적 선택으로 인한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 부족하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했다. 이씨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해 진행된 심리 부검에서는 박양이 학교폭력으로 오랜 기간 고통을 받았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이는 증거로 채택되지 못했다. 이씨는 항소했다.
이씨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잘못했다”, “죄송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씨는 중학교 때 박양을 괴롭힌 가해자가 서울의 한 여대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라고 했다. 학교폭력 피해자 모임에도 참여했던 그는 “정순신 사건처럼 권력과 돈 가진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고 아무렇지 않게 살지만, 피해자와 가족은 힘겹게 산다”고 했다.
이씨는 “한국 사회가 점점 희망이 없는 사회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학교폭력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쏟아지는 각종 대책은 ‘보여주기식’에 지나지 않았다. 손쉬운 처벌 강화에만 매달릴 뿐 정작 무엇이 피해자·가족의 치유와 회복을 돕는지에 대해선 무심했기 때문이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라는 논리에 학교폭력 피해자와 가족들의 고통은 현재 진행 중이다.
서혜미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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