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을 도덕으로 평가하는 나라, 그곳은 한국"[0]
조회:285추천:0등록날짜:2022년02월01일 11시56분
"모든 사람을 도덕으로 평가하는 나라, 그곳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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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혹은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철학 그 자체가 영토, 사람, 주권으로 응결된 것이 조선 혹은 한국이다. 여기에서 철학이란 리(理)를 말한다.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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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보편의 운동이다. 이 보편을 격렬한 논쟁에 의해 거머쥔 자가 권력과 부를 독점한다. 즉 ‘리’는 진리이자 규범이자 돈과 밥의 원천인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가 체현하는 ‘리’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일원적으로 서열이 정해진다. 체현하는 ‘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20쪽)
한국사회는 사람들이 화려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다. 한국 사회의 역동성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과 흥분은 항상 여기에서 유래한다. 사람들은 도덕을 쟁취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필사적으로 자기 선전을 하고 있다. 운동선수도 연예인도 동성애자도, 심지어는 범죄자까지도 하나같이 공적인 자리에서 도덕을 외친다. 경기 성적이나 노래 실력만으로는 평가받지 못하고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인가를 국민들에게 납득시킨 후에 비로소 스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2쪽)
즉 ‘기’에는 ‘좋은 기’[맑은 기]와 ‘좋지 않은 기’[악한 기]가 있다. ‘맑은 기’는 원래의 ‘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만 ‘탁한 기’는 ‘리’를 흐리게 한다. 이 중에서 ‘리’가 흐려진 자가 바로 나쁜 사람이라는 것이다. (35쪽)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는 관념을 어떤 한국인도 강렬하게 의식하고 있다. 그리고 ‘있어야 할 자리’와 지금 실제로 자신이 ‘있는 자리’와의 거리를 줄이려고 항상 노력하는 것이 한국인의 일생이다.
지금 자신이 있는 자리에 만족하거나 혹은 의문을 갖지 않고 그 자리를 편하게 느끼고 깨끗하게 하려고 하는 일본인과는 크게 다르다.
한국인에게 ‘본의 아니게 지금 있는 자리’는 그리 강한 집착의 대상이 아니다. (…)
한국인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그것과 거리가 생겼을 때에 소란을 피우며 괴로워한다. 원래는 자신이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장애로 ‘저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저 ‘자리’에 앉고 싶다는 동경, 그리고 앉을 수 없다는 고통, 그것이 ‘한’이다. (67쪽)
일본에서는 “지식인은 약하다”라고, 한국에서는 “지식인은 강하다”라고 여겨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말=논리>는 연약한 도구이고, 칼은 용감한 도구라고 여겨진다. 역으로 한국에서는 <말=논리>가 용감한 도구이고, 칼은 연약한 도구라고 여겨진다. 여기에서 ‘용감하다’는 것은 싸운다는 것이고, ‘연약하다’는 것은 싸움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소년들은 “남자라면 말로 따지지 마!”라고 교육받고, 한국의 소년들은 <웅변=논리>를 연마하기 위해서 웅변전문학원에 보내진다. 일본에서는 말은 싸움을 회피하는 도구이고, 칼이야말로 싸우는 도구이다.
역으로 한국에서는 칼은 싸움을 회피하는 도구이고, 말이야말로 싸우는 도구이다. 자신이 믿는 도덕을 손에 들고 언어를 연마하여 그 날카로움으로 죽음을 건 승부에 나선다. 지면 삼족(三族, 부모, 형제, 처자)이 희생될 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말싸움이 죽음을 걸 정도로 격렬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유교 사회의 지식인은 죽을 때까지 도덕으로 싸우는 격투기 선수인 것이다. (130쪽)
한국 사회의 주역은 무엇이었는가? 첫째도 지식인, 둘째도 지식인, 셋째도 지식인이었다. 이것은 조선시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온 한국 사회의 커다란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일본인은 한국의 지식인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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