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할퀴고 간 반지하.."떠나고 싶어도 갈 데가 없어요"[0]
조회:51추천:0등록날짜:2022년08월11일 11시18분
폭우가 할퀴고 간 반지하.."떠나고 싶어도 갈 데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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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수 피해 집중된 서울 관악구·동작구 일대
골목에는 젖은 장판과 가전제품 등 산더미
서울 20만호가 지하·반지하 방
“이 시커먼 자국이 다 똥물 자국이에요.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로 닦고 해도 안 지워지네요. 약을 뿌려도 냄새도 안 빠지고.”
10일 오후 서울 동작구 신대방1동 다세대주택 반지하에 사는 백아무개(66)씨는 장롱 밑 장판을 들어 올려 시멘트 바닥에 있는 검은 얼룩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젖은 바닥을 말리기 위해 보일러를 튼 까닭에 바깥보다 실내 온도가 더 높아, 백씨는 이마와 목에 수건을 두른 채 굵은 땀을 훔쳤다. 지난 8일 저녁 7시30분께 백씨의 집 현관문 앞에 있던 정화조에서 물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집안에서는 화장실 하수구를 통해 물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백씨는 “양수기 3대로 물을 정신없이 퍼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이날 침수 피해가 집중된 서울 관악구·동작구 일대를 둘러보니 지난 8∼9일 퍼부은 폭우의 흔적이 역력했다. 차도가 지나다니는 대로에도 마르지 않은 진흙이 군데군데 있었고, 침수된 차들도 방치돼 있었다. 다세대주택이 밀집한 좁은 골목 안쪽에는 반지하 거주자들이 내놓은 집기들로 차가 지나다니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난 8일 밤 40대 자매와 딸 등 세 가족이 숨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주택가 일대는 양옆으로 장판·가구·옷·매트리스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세 사람이 숨진 주택에서 직선거리로 약 100m 떨어진 다세대주택 반지하에 사는 김아무개(52)씨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찔했다”고 말했다. 이 주택 반지하에 있는 가구는 총 3가구로 거주자 모두 현관문을 열어둔 채 침수된 집을 정리 중이었다. 김씨는 “(8일에는) 대전으로 건설 현장 일을 하러 갔기 때문에 집에 없었다. (대피한)옆집 사람 말을 들어보면 밤에는 물이 가슴까지 찼다고 하는데 그러면 현관문이 열렸겠느냐”며 “만약 그날 집에서 자고 있었다면 방범창 때문에 창문으로도 나갈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 주민센터에 피해 신고를 했지만 “신고해봤자 얼마나 나오겠느냐. 답이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김씨는 냉장고·티브이(TV)·밥솥·선풍기 등 집안에 있는 거의 모든 가전제품을 버리고 전날(9일) 밤부터 여관생활을 하고 있다.
8일밤 폭우로 생명의 위협을 코앞까지 느낀 주민도 있었다. 남편과 함께 반지하 주택에 살고 있는 임아무개(63)씨는 “내가 양수기를 빌리러 주민센터에 간 사이에, 집 안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게 현관문을 닫고 있던 남편이 집밖으로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며 “119가 창문을 뜯어내고 피아노 위에 올라가 있던 남편을 구조했는데, 조금만 늦었더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임씨는 “11일에도 비가 온다는데 또 집이 잠길까 봐 걱정이 크다”고 한숨을 쉬었다.
침수 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당장은 임시거주시설, 자녀·친인척집 등에서 머무르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도 다른 주거지를 알아보기도 어려운 처지다. 동작구 주민 심인택(75)씨는 “나는 기초생활수급자라 나라에서 빌려준 돈(LH 저소득층 주거비 지원)으로 살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다”며 “이전에 대림동에 살 때도 침수 피해를 겪은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임씨도 “부동산(공인중개사 사무소)에 살 집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이 근처가 다들 형편이 이래서 방이 없다고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으니 절대 반지하는 살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싼 집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서울시가 10일 발표한 ‘지하·반지하 거주 가구를 위한 안전대책’을 보면 주거용으로 쓰이는 지하 또는 반지하 방은 서울 전체 가구의 5%에 해당하는 20만호가량인 것으로 집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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